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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띠띠사 5 - 1894
이름: 박대환


등록일: 2009-08-28 18:11
조회수: 1616


- 1860 베이징 조약과 동학 창시

영국 세상이었다.
워낙 여기저기 점령한 곳이 많아 영국 깃발이 펄럭이는 땅 어딘가엔 반드시 해가 떠 있다 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산업혁명의 나라고, 제국주의의 선두주자다. 당시 국제화폐는 은이었다. 드넓은 중국 시장을 공략하면 은이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세계 무역으로 따지자면 관록의 중국에 영국을 비할 바가 아니다. 공정했건 공정하지 못했건 영국이 의도한 바와 달리 은은 오히려 중국으로 몰려 들어간다. 영국은 이에 대응하여 삼각무역을 실시한다. 중국은 영국에게 은을 주고, 영국은 면을 인도에 주고 인도는 아편을 중국에 준다.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청의 관료들은 사태의 심각성 앞에서 무감각하다가 결국 온 나라 사람들이 마약에 찌들어 그 나라의 뿌리까지 상해 들어갈 즈음에서야 비로소 영국의 아편수출을 막고 나선다. 영국은 고민에 빠진다. 여기서 물러서면, 영국은 그 동안 잡아 왔던 제국주의의 주도권을 프랑스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중국과 한 판 붙느냐 마느냐. 영국 의회에서 대단히 근소한 차이로 주전론이 승리하게 되고, 결국 아편전쟁이 터진다. 뚜껑을 열어 보니 중국은 종이호랑이. 청나라가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자 그 실체를 알아 차린 서양 열강들은 승냥이 때처럼 중국을 뜯어 먹으려 달려 든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북경으로 진군하여 수도를 함락시키고 베이징 조약을 맺는다.

사실상 여기서 청나라는 망했다.

이 사실을 조선사람들이 전해 들었다.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던 중국이 망했단다.", "서양 놈들이 쳐들어와 천자를 잡아 갔단다."
조선말, 세도정치의 폐해로 온갖 수탈의 표적이 되어 하루하루 힘겹게 삶을 이어가던 조선 민중들에게 전해진 중국의 몰락의 소식은 그들을 극심한 불안과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다.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던 바로 그 해에, 수운 최제우가 한국 보수주의의 산실, 영남의 한 가운데에서 동학을 창시한다. 그는 정통 퇴계학파의 자식으로 태어나 철저한 유교교육을 받아 십 대 중반에 이미 사서삼경을 비롯한 각종 주요 문헌을 통달했다. 그러나 재가녀의 아들인 그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법조항에 의해 애초부터 출세길은 막혀있었다. 여기서 재가녀란 첫 부인이 죽어서 나중에 결혼한 부인을 말한다.

스무살이 되기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 부양을 위해 보부상으로 나선다.
1840년대 중후반부터 1850년대 중후반에 걸쳐 전국을 주유하며 조선의 실상을 낱낱이 체험하고, 여러 계층의 인물들을 두루 만나 세계 정세를 간파한다. 기독교, 기계문명, 자본주의 및 공산주의 등의 거부할 수 없는 서양문명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범민족적 가치혁명을 내세워 다시개벽이라 했고, 서쪽의 신을 모시는 것을 서학이라 하니, 동쪽에서 우리의 신(하늘님)을 받드는 우리는 동학이라 부르기로 한다 했다.

기독교의 직접적인 모방으로 탄생한 중국 태평천국교 교주 홍수전은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고 예수의 부인까지 (-_-) 만나고 왔다는 등의 신비주의로 교세를 확장한다. 당시에 희망이 없었던 중국 농민들은 어쨓거나 살길을 열어 주는 태평천국교에 미친 듯 빨려 들어가고, 엄청난 세력 확장을 통해 남경까지 장악한다.

기독교가 중국으로 들어가 변질되어 태평천국교가 된 것에 반해 조선에서는 그 모순을 딛고 동학을 창시해 냈다는 사실은 매우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현상이다. 최제우는 열심히 기도해 본 결과 기독교의 천주와 예수는 만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수직적 세계관은 왕조이후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없다하여, 각자 개인마다 전 우주를 하나로 모아 발생하는 가치를 가진 생명체라는 것을 자각하는데 스스로 노력하라 했다. 즉, 인내천(人乃天)이다. 그가 동학을 창시하던 자세는 솔직하고 판명했다. 1963년에 골수 영남학파들이 자기네 본거지에서 사학이 창궐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하여 최제우를 범죄자로 사주해 처형시키는데, 그 죄목은 "천주쟁이"였다.


- 1861 미국 남북전쟁 시작.

이 전쟁의 원래 명칭은 American Civil War 이다. 대단히 복잡한 전쟁 발발 원인이 있으나 그 중에 괄목할만한 것은 유럽과 미국 사이에서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 내려오던 반인륜적 노예무역의 근절이었다. 1865년에 노예 해방에 찬성하던 북군이 승리함으로서 미국은 만민의 자유와 평등이 함께 구현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희망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종전과 동시에 링컨이 암살되고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세력에 뒤늦게 동참하여 아시아에서의 기득권 획득을 위해 일본을 함포 개항시킨다.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세계 대전을 통해 부국강병의 꿈을 선점한 미국은 1945년 이미 패전이 확실한 나라의 머리 위에서 핵폭탄을 폭발시킨 이후 오늘 날 까지  전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는 깡패국가로 군림하게 된다.


- 1862 삼정문란과 임술민란

흔들리는 민심을 다독거리기는 커녕, 안동김씨 세도정치는 극에 달하고 500년 조선 조정의 법권위와 유교적 합리주의는 개차반 나고 말았다. 과거엔 각 지역의 사족이나 향반이 신분의 권위를 정의롭게 발휘하여 지방관의 부정부패를 견제하는 경우도 많았고, 또한 그것이 보편적 도덕률이었다. 이러한 유교적 질서가 지켜져야만 사회 전체가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조선의 사회구조였으니 각 지역의 양반들이 갖추어야 했을 자발적 보수성은 견고해야했다.
그러나 법치국가에서 법보다 강한 세도가가 군림할 땐 그러한 사회구조는 일거에 붕괴된다. 그것이 조선말의 상황이다. 돈만 있으면 개나 소나 다 양반이 되는 환경에서, 상공업으로 큰 부를 취한 중인들이 양반신분으로 편입되면서 양반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고 또한 그들의 졸부근성은 그들로 하여금 정경유착의 고리역할을 하게 한다. 하위 계급들은 곧장 착취의 표적으로 노출되는데 착취 방식은 주로 세금의 부당 부과 및 불법수취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를 일컬어 조선말 “3정의 문란”이라 한다. 3정은 전정,군정 그리고 환정을 가리키며 그 문란함의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전정- 농산물에 대한 세금과 부가세. 조세 납부조직을 만드는 이서배들을 전방에 내세워 수령,향임,양반들이 조세수취를 일삼음.
군정- 돈으로 신분을 상승시키지 못한 양민들만 군복무 부담 가중.
환정- 악독한 고리대금 사채.

기타 농업 이외의 생산과 유통에 부과한 세금으로 잡세와 잡역세 등이 있다. 이 시기에 벌써 유교적 신분 질서에 근거하는 양반 계급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그러나 양반이 된 당사자들은 스스로에게 가식된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퇴계의 주리론적 이상주의 표방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다. 국제적 감각을 상실한 조선의 껍데기 귀족들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관념의 늪에 빠져 세금 수탈할 궁리나 하고 앉았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러한 조선의 중상류층의 행태로부터, "조선인은 게으르다."는 평을 내려 이후에는 그것이 마치 조선인 전체의 성질을 말하는 양 와전된다. 3정의 문란에 항거하는 민란이 1862년 임술년에 전국 각 고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지만 당시 동학의 영향력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 1863 철종 승하, 링컨 노예 해방 선언

철종이 승하하고, 왕족 이하응의 어린 아들을 대비 조씨가 입양하는 방식으로 이하응의 어린 아들은 고종이 된다. 풍양조씨와의 세도 싸움에서 승리한 후 누구도 자신들에게 도전하지 못하리라 방심하던 안동김씨 무리들이었다. 안동김씨 세도가들에게 전혀 위협을 가할 인물이 아니라는 눈가림 전술을 구사하느라 늘 미친척 하고 돌아 다닌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왕가의 권위 다시 잇고 싶어 했던 조대비와 힘을 합쳐 철종 승하 무렵 신속하게 연합전선을 구성해 왕권을 꿰어 차고 들어갔다. 방심끝에 이렇다할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날으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동김씨들은 이씨 왕족에게 권력을 빼앗기게 된다.


- 1865 미국 링컨 암살.

- 1866 병인양요, 제네랄 셔먼호 사건.

프랑스 신부 처형 문제로 프랑스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대륙에 상륙했으나 조선군의 막강한 저항에 밀려 패퇴한다. 대동강에 불법 정박한 미국 제네랄 셔먼호를 야간 기습작전을 통해 불태워버린다. 서양 세력에 대한 은근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불확실하다. 흥선대원군이란 그저 왕권회복을 위해 모든 인생을 바친 사람이다. 안동김씨 세력에게 제거당하지 않기 위해 오랜기간 폐인행색까지 마다 않았던 철저한 승부사다. 그 해에 명성황후를 왕비로 책봉한다. 외척의 발흥이 가장 없을 집안을 고르고 골랐으나, 결국 세상은 민씨 손아귀로 넘아가게 된다.


- 1868 일본 명치유신, 조선 독일인 오페르트 사건.

막부시대 마감하고 천황시대 시작. 미국에 의해 함포 개항하였으나 결국 스스로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새 국가체제 건립한다. 이후 조선 개화파와 대한민국 개발독재 세력의 모델이 되는 일본의 명치유신은 부국강병을 명료한 국가적 목표로 삼는다.
그 해에 조선에서는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가 도굴당할 뻔 한다.  풍수가의 예견에 따라 이러한 사건을 대비해 봉분 속에 철판을 넣어 관을 보호한 덕분에 도굴 당하지는 않았다. 개항이냐 쇄국이냐를 놓고 갈등하던 대원군, 오페르트 덕택에 양놈들은 도적때들이라 판단 쇄국단행. 고종은 궁인 이씨(이후 영보당 이씨)에게서 왕자를 얻고 완화군이라 칭한다. 당시 적서의 차별이 없었던 가운데 명성황후는 완화군이 세자로 책봉될 경우 자신과 자신의 자식에게 돌아 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철저한 위기관리에 들어간다. 우선 출중한 미인이자 더군다나 왕손을 낳아 준 영보당 이씨가 빼앗아 간 고종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림과 동시에 반흥선대원군 세력을 규합하는데 몰두한다.  

명치유신과 신미양요 사이 약 3년. 조선은 3000년 일본역사를 뒤집어 엎는 일본식 개벽의 순간을 예의주시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집안싸움에만 몰중했다.


- 1871 신미양요

일본의 문을 연 미국이 이번엔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킨다. 조선이 싸움에서 패했으나 흥선대원군은 배짱 좋게 전국적 저항을 선언했고, 이렇게 전쟁이 확대될 줄 몰랐던 미군들은 청나라로 퇴각하게 된다. 조선은 다시 한 번 자신감 획득.


- 1872 명성황후 첫 원자 탄생 및 사망

고종의 사랑을 독점하는데 성공한 명성황후는 드디어 첫 아들을 탄생시켰으나 4일만에 항문이 막혀있는 대변불통증으로 사망. 외과 수술로 살릴 수 있다는 명성황후의 요청에, 흥선대원군은 왕족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다는 이유로 묵살하고 산삼이 만병통치약이라 하여 달여 먹인 바람에 고열로 즉사한다. 명성황후 가슴에 한이 맺힘. 하지만 1874년에 낳은 차남이 이후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되지만, 정작 본인은 아들의 등극을 보지 못한다.


- 1873 흥선대원군 실각.

신미양요 이후 자신감을 얻은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해를 몰아내고자 안동김씨 세도의 틀을 깨는데 성공했으나, 보복의 위협 없이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 붕당과 파벌 그리고 가문에 기준을 두지 않는 성숙된 정치의식을 보인다. 국가 재정 누수와 소모적 정치 분쟁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고, 3정문란을 바로 잡고자 양반계급에게도 세금을 부과하여 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는다. 그러나 문제는 국제적 감각의 미비였다. 흥선대원군의 정책기조는 오직 왕권복고와 쇄국이었고, 시대의 요구는 민중의 참여와 개화였다. 흥선대원군 10년 통치 후 실각하게 된 원인은 아래와 같다.

• 국제감각을 상실하고 끝없이 민심과 소통하지 아니하는 권력이 자신의 진정성만 믿고 불도져처럼 밀어 붙였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일제의 허수아비 노릇까지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 민심을 얻었다고 생각한 흥선대원군은 그 민심이 곧 자기 정책에 대한 지지라고 판단한 후, 중국의 자금성만큼은 못되나 외세가 업신여길 수 없을 만큼 왕조의 위엄을 갖추고자 임진왜란때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왕조에 분노하여 민중들이 불태워 버린 경복궁을 재건함.
• 경복궁 재건 사업으로 백성들에게 다시 막중한 세금과 부역이 부과되자, 잠깐 왕조에 호의를 보였던 민심이 급속도로 이반하기 시작함. 으리으리한 관청 이전에 중요한 것은 튼튼한 경제 체질인 것이다.
• 명성황후의 반흥선대원군 세력 규합 성공.
... 외척 중용.
... 실력 미달로 대원군에게 버림받은 왕족들과 결탁
... 권력을 잃은 안동김씨들에게 다시 복권의 가능성을 열어 줌.
... 고종의 형, 그러니까 대원군의 큰아들을 이용해 대원군측의 정보를 캐냄.
... 형이 동생만 못해선 되겠느냐며 대원군의 형 흥인군의 불만을 부추겨 대원군에게 불안 세력이 되게 함.
... 서원철폐로 앙심 가득한 유림들과 세금 부과로 불만에 찬 돈 많은 양반들과도 제휴.
... 결정적으로 고종을 자기 편으로 돌려 세우는 데 성공.
• 대변불통증으로 자식을 잃은 후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에게 정치적 십자포화를 가하기 시작함.
• 급속도로 근대화, 자본주의화 하고 있던 일본은 아직 서양 열강들이 조선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틈에, 마침 무능한 정부가 자기들 끼리 싸우며 힘을 소진하로 있을 때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먼저 조선을 복속시켜야 한다는 정한론이 발생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명성황후측은 이 정보를 백성들에게까지 흘려 보내 이에 적극 대응하지 않으면 제2의 임진왜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불안을 가중시켜 궁궐 안팍으로 대원군파의 무능을 질타함.
• 흥선대원군 세력 전방위 방어에 나섰으나, 고종이 결정타를 날린다. “나도 이제 다 컸어요.” 이제 나도 어른이 되었으니 아버지 없이 스스로 왕권을 행사하겠다는 친정(親政)선포한다.
• 아무런 명분이 없던 흥선대원군, 즉각 퇴장당하고,
• 이 때 흥선대원군 나이 53세, 명성황후 22세 였다.

진정한 소녀시대였던 것이다!
이 때라도 정신차리고 조선 전체의 신지식인들과 동학 대표자들, 천주교 및 불교 세력들, 그리고 정통 유림들을 아우르는 대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어야 했다. 정부가 주도하기만 했으면,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본다.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안동김씨의 수장을 흥선대원군이 직접 찾아가 국정을 논의하기도 했었던 것이 또한 당시의 합리적인 상황이기도 했다. 지금 청나라는 미쳐도 벌써 미쳤고, 일본은 훗날 표명하는 광기어린 대동아 공영권 구상을 잉태하고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몰아 내기 위해 등용한 민씨 외척들은 안동김씨 세도보다 더 한 권력으로 한 숟갈이라도 더 해 쳐먹으려고 난리법석이었고, 꼴뚜기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고 지방 수령관들의 착취는 날이 갈 수록 심각해져만 갔다.


- 1876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한일수호조약) 그리고 조선의 개항.

명성황후측이 권력을 쥐자 곧바로 신지식인 층 개화 관료 등장하여 개화파가 된다. 이 개화파는 전형적인 한국형 계몽주의자들로서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르기 까지, 관념적 공명정대함과 변태적 보수주의의, 그리고 자기 민족의 성향에 무지하면서 일본과 서양 것을 숭상하는 모순을 합리화시키는데 능통한 것으로 통한다. 딱 한 사람 꼽아 보라면, 바로 김옥균이다.

일본은 조선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일본은 이 혼란정국을 틈타 그 동안 일본과 조선이 맺어 왔던 전통적 소통관계를 마무리 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해 왔다. 그러나 이미 국제법은 불공평하므로 조선은 거절한다. 1876년 어느 날 운요호라는 일본 배가 조선 해안을 측량하고 있다. 조선 해안수비대가 포문을 열고 위협사격을 가하자, 운요호는 그를 빌미삼아 기다렸다는 듯이 응사해 조선 해안수비대를 박살내고 명치유신 이후 달성한 그들의 군사력을 과시한다. 곧이어 일본은 일본 군대를 강화도에 상륙시킨 후 조약을 강요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선에서의 통상활동을 보장받는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력이었다면, 일거에 한양을 접수할 수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한창 중국을 뜯어 먹고 있던 서양 세력들과의 이해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조선을 건드렸다간 다른 제국주의 연합전선에 밀려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강화도 조약 제1조엔 조선이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해 놓았다.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해 주려는 호의가 아니라, 그들의 침탈을 정당화 하려는 수작이다. 이후 국권을 강탈하기 전에 조선을 아예 대한제국으로 바꿔버리고 국제 무대에서 독립국 행사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금으로 따지면 조선과 일본 그리고 서구 열강들과의 다자간 FTA가 성사되는 꼴이다.
일본은 조선의 양곡을 무제한 유출해 나가 비싼 값을 받고 FTA가 성사 안된 타국에 팔아 이문을 남겼다. 자기 양식 빼고 남는 것으로 장사하는 지주들은 누구에게 팔아도 돈만 받으면 상관 없었으므로(천민 자본주의 원형) 일본의 쌀 유출에서 함께 이득을 보았다. 조선의 지주가 친일화 되는 모양새가 갖춰진다. 대신 조선의 민중들은 엄청난 식량 부족과 물가고를 겪어야 했다. 일제시대 보릿고개의 시효다. 이후 경술국치 이후 토지까지 강탈당해 보릿고개는 구조화되었다가 박정희 시대에나 와서야 겨우 보릿고개 구조는 사라진다.
보다 못한 지방관들이 방곡령(쌀수출금지)를 실시하는데, 몇몇 수령들이 방곡령 실시 30일 전에 일본정부에 통보해야 한다는 조항을 수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국가가 배상금을 치루고 방곡령은 철회되었다. 이것 역시 FTA를 실시할 경우, 기업이 국가나 공공행정관청을 고발할 권리를 가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본을 통해 영국산 면포가 무한정으로 쏟아져 들어 오면서, 우리나라 목화 산업을 위시한 수공업분야는 산업혁명후 제품을 기계로 찍어 내는 나라들의 물건에 밀려 급속히 몰락한다. 개항에서 임오군란까지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조선은 일본판이 되면서, 일본이 침투하기 좋은 구조를 갖추게 된다. 조선은 지주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극심한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여 대부분의 민중은 비정규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이제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런대로 일본만 상대하면 되는 때였다.


- 1882 임오군란

개화파가 추진한 신식군대 별기군의 설치후 차별대우받은 구식군대의 반란. 이는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에 의한 내전이라 볼 수 있다. 명성황후는 급 피신하고, 흥선대원군이 다시 복권한다. 흥선대원군은 차제에 명성황후 세력의 재발을 방지하고자 시신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전의 국상을 선포하나,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린다. 고종의 물밑 지원으로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대로 자국 군대 제압하고 흥선대원군 몰아 낸 후 다시 입성하게 되며 그 댓가로 청은 조선내부 통상권 획득.

보수파의 일시적인 승리에 힘입어 재등장한 흥선대원군 청나라 세력에 밀려 다시 실각하고 명성황후 복권한다. 이제 개항이후 일본판이었던 조선에 새삼스럽게 청나라 세력이 급부상한다.

이 때 개화파는 분리된다.

• 온건 개화파
... 명성황후 일족과 유대.
... 조선왕조와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부국강병.
... 급진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에 껴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민심을 얻지도못해 세력이 사라짐.

• 급진 개화파 - 일본의 명치유신급 개혁을 통해 청나라와의 사대를 끊고 부국강병.
... 이후 갑신정변의 실패로 사라짐.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 이후 절치부심하던 명성황후는 일본이라는 외세를 견제하기 위한 또 다른 세력으로 청나라를 선택한다. 점입가경이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된다.


- 1883 영국, 독일에 개항.

- 1884 갑신정변, 이탈리아와 러시아에 개항.

베트남을 두고 청나라와 프랑스간 전쟁이 발생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군 절반이상 철수하게 된다. 민씨 일족을 가리켜 청나라에 사대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사대수구세력이라 규정해 오던 급진 개화파는, 조선내 청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일본군을 등에 업고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손에 쥔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다. 입헌군주제 형식의 국민주권주의를 표방하게 된다. 명성황후는 다시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했고, 맞서 싸워 줄 것이라 믿었던 일본군은 즉각 후퇴해 버리고 만다. 청나라와 같은 대국과 싸우는 것은 시기상조라 보고 자제했던 것이다. 갑신정변 개화파들 단 3일동안 궁궐에서 살다가 일본군이 도와 주지 않자 모두 일본으로 도망가 숨어버린다. 실각했던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의해 다시 복권한다. 이 때 조선은 벌써 조선이 아니다.
그리고 천주교 판이었던 조선에 갑신정변이라는 사건을 통해 미국 개신교가 발을 들여 놓는다. 이 이야기는 따로 떼어 이어가겠다.


- 1885 천진조약

청나라와 일본 중 어느 한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투입될 경우 상대방 국가의 군대도 자동으로 투입된다는 조약을 체결하여, 갑신정변때 충돌할 뻔 했던 양국간의 상황을 정리한다.


- 1886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개항.

- 1890 일본 경제 공황

명치유신 이후 부국강병의 모토 아래 급속한 경제성장을 도모하던 일본은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서양과의 무역경쟁에 돌입했으나 10년만에 자본주의 모순의 결과인 공황을 맞게 된다. 즉, 시장의 발전은 제약되어 있는데 투자확장은 지속되는 것이다. 물건은 쏟아져 나오는데 살 사람이 없다. 그럴 때 침략을 통해 시장을 확대하자는 것이 제국주의요, 그러고도 만족이 안되거든 전쟁을 일으켜 돈 대신 사람의 목숨값으로라도 물건을 소비하자는 발상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세상이 섞어서 만들어 내는 세계 대전들이다. 일본 민족의 명운을 걸고 야심차게 시작한 명치유신이 10년 만에 좌초될 위기에 봉착하자, 조급해진 관료들과 일본 지배층 사이에선 다시 이래야 되니 저래야 되니 내가 잘했니 니가 못했니 하며 대립이 격화되고, 그러는 사이에 농민과 노동자들의 경제상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경제공황과 국내 정치 불안을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필요성이 극에 달했을 때 조선은 1894년을 맞는다.

- 1894 갑오농민항쟁, 청일전쟁 그리고 갑오경장

혼란한 정국 속에서도 각 고을의 수령과 향리들은 여전히 백성수탈에 혈안이 되어있다. 이런 고난의 시절 속에서도 농민들의 뜻을 수렴하고 서로 협업하여 생활고를 이겨 낼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조직적 집단은 1860년 이후부터 동학이요 또한 천주교였다. 동학은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교리와 각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으로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었고, 접주제를 통해 전국에 튼튼한 동학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 동학은 이미 조선의 가장 구체적인 민중세력이 되었고 따라서 그 대표자들은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동학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해 달라 요구하였지만 정부는 이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 민족 생존을 위한 태반과도 같았던 호남의 고부군에서 군수를 맡고 있었던 조병갑의 수탈은 극에 달한다. 전주와 나주를 잇는 호남의 핵심지역이었던 고부에서 임기를 마친 조병갑은 익산군수로 임명 받지만, 중앙 인맥에 인사청탁을 넣어 다시 고부군수로 재임명 받는다. 그렇게 조선의 1894년 갑오년이 시작된다.

• 1월 10일 조병갑의 공식 재부임일 새벽에 고부군 동학 접주 전봉준을 중심으로 약 1000여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들이 고부관아 습격,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눠 줌.
• 세곡 환원 이후에 이어갈 구체적 활동 계획이 없었고, 새로 부임한 신임군수가 상황을 잘 무마하려는 자세를 보여 고부 농민항쟁은 그것으로 수그러 드는가 했으나, 이후 파견된 안핵사(민란 수습관) 이용태가 역적죄목을 들어 공권력을 강제 투입해 전봉준의 집이 불타고 그의 아버지가 살해 되었다.
• 3월에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여 재차 봉기한다. 동학 농민군은 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고 이때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도 대거 참여하여 그 숫자가 수만명에 이르렀다. 제갈량의 출사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동학농민군의 포고문은 거사의 대의 명분을 뚜렷이 하고 있고 또한 조선민중들에게 갖추어져 있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가치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포고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세상에서 사람을 귀하게 여김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君臣父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라.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한 후에야 비로소 집과 나라를 이루어 능히 무궁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인효자애하고 신명성예하시니 현명하고 어질며 정직한 신하가 보좌하여 정치를 돕는다면, 요순의 교화와 문경의 정치를 가히 해를 보는 것처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하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한갓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첨과 아양을 부려 충성 된 선비의 간언을 요망한 말이라 하고 정직한 신하를 일러 비도(匪徒)라 하니,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에게 사납게 구는 관리가 많아서 백성들의 마음이 날로 더욱 나쁘게 변해 가고 있다. 안으로는 삶에 즐거움이 없고 밖으로는 보호할 방책이 없다. 학정은 날로 커 가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여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수가 드디어 무너져 하나도 남지 않았다. 관자(管子)가 이르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 했는데,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도 더 심하다. 공경(公卿) 이하로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않고 한갓 자기 몸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것만 생각하여, 사람을 뽑아 쓰는 곳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보고 과거 보는 곳을 교역하는 저자거리로 만들었다. 허다한 뇌물은 나라의 창고에 넣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이 저장하였다. 나라에는 쌓인 빚이 있는데도 이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게 놀면서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바가 없으니 온 나라가 어륙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다. 수령들이 재물을 탐하고 사납게 구는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밖에 향제를 세우고 오직 혼자만 온전 하려는 방책에 힘쓰면서 녹봉과 지위만 도둑질 하고 있으니, 어찌 옳은 이치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버려진 백성이나 임금의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임금이 주신 옷을 입고 있으니, 가히 앉아서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온 나라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창생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사는 맹세를 하노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움직이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하여 함께 승평한 일월을 빌고 모두 성상의 덕화를 바랐으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이것이 중국과 일본 민중들에게선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던 조선 민중의 자발적 국가관, 민족관, 도덕관이다. 일본은 관료들이 백성들에게 국가적 집단의식을 광적으로 주입시켜야 했고, 중국은 워낙 넓은 땅덩어리에서 여러 민족이 번갈아 가며 통치를 해 왔기 때문인지, 전체 국가가 하나의 민족으로서 단결해야 할 필요의식이 빈약했다. 훗날 모택동과 장개석이 항일투쟁을 벌일 때 중국 민중들에게 가장 주입하기 어려웠던 것이 민족의식이었고, 중국민들에게 항일의 의미를 몸소 가르쳐 준 것은 조선이라 하여 장개석은 임시정부 지원으로, 모택동은 훗날 김일성 지원으로 그 보답을 하게 된다.

전봉준은 동학 접주이나 포고문엔 동학 이야기가 없다.

• 4월에 전주성에 입성.
치안 및 질서 유지를 위해 동학농민군은 호남지방 각 군현에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함. 이는 해방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인민자치위원회로 이어짐.

• 청나라에 파병 요청. 천진조약에 의해 일본군 자동 파병.
5월에 농민군은 전주성 철수 조건으로 폐정개혁안과 신병보장을 요구하고 결국 타협을 맺게 됨. 농번기에 농민군들은 농사를 지어야 했다.

• 6월 청군 아산만 상륙. 일본군 부산 상륙.

• 일본군이 먼저 인천-서울간 정치 및 군사적 요충지 장악.

• 정부는 소요가 진정되었다며 양국 군사의 철수를 요구.
... 일본은 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역주장.
...또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변란의 근원을 단절할 수 없고 이는 일본에게도 위협이 되는 요소라며 철병 거부.
...그러나 일본의 속셈은, 종이호랑이 호랑이와 남의 땅에서 안전하게 전쟁을 벌여 내국 경제공황을 타파하고,
...또한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경쟁하기 위한 첫번째 숙제인 극동 아시아에서의 러시아 견제를 위해 조선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
...일본은 조선이 순순히 굴복하여 청일전쟁에 협조하기를 바라는 저의로 내정 개혁을 요구했으나, 명성황후 세력은 일본군 철병이전엔 불가능하다며 버팀.

• 7월 일본군 경복궁 무력 점령. 쿠테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권 수립.
이후 곧바로 선전포고 없이 청군 공격

... 갑오개혁(갑오경장)과 군국기무처.
... 흥선대원군은 세력의 들러리였을 뿐이고 실세는 군국기무처 책임관인 김홍집.
 개국기원을 사용해 청과의 사대관계 근절.
 국왕의 인사권,재정권,군사권등을 박탈 혹은 축소.
 조선의 전통적 6조 체제를 8아문(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 형태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둠.
 공문서에 한글사용.
 과거제 폐지하고 일본식 관료제 도입.
 일본식 관료제란?
 명치유신 이후 사무라이 출신 행정관들이 적극 추진.
 국립대학을 설립해 관료를 양성한다. 동경대학이 그 대표적 국립대학이다.
 그러한 목적으로 세워진 동경대학이 키워낸 제국주의 일본의 영웅은 뭐니뭐니해도 이등박문(이토오 히로부미)이다. 물론, 나중에 안중근의사가 죽인다.
 조선은 개항후 설립된 근대 교육기관을 졸업한 자나, 해외 유학생 위주로 관료를 선발했고 그러는 와중에 동경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관료 배출 기관으로서의 대학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 500년 전통의 유교식 관료제가 끝나고 인재 등용에 신분의 제약을 없앴다.
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 학교 세움.
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별 철폐.
 조혼 금지.
 과부 재혼 허용.
 기타 약 200개가 넘는 개혁안을 3개월 동안 모두 통과시킨다.

• 8월 일본군은 아산과 그 인근에서 청군 격파했다. 청나라 군대는 이미 일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 8월 27일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對朝鮮對日本兩國盟約:朝日盟約)을 체결, 군수물자 이외의 식량, 부식물, 수송 노동력 등은 조선 현지에서 조달하기로 한다.

• 조선땅에서 들어 온 남의 나라 군인들을 위해 조선의 땅을 내어 주고, 조선의 재화로 먹여 살려하고 그 뒷치닥거리까지 조선이 맡아주어야 했다.

• 이러한 현실 앞에서 동학농민군은, 그들이 먼저 싸워서 이겨야 할 상대는 일본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 9월에 일본은 평양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연이어 벌어진 황해해전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의 주력을 격파.

• 10월에 일본군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 진격한다.

• 같은 달 동학 농민군은 전면적 재봉기를 준비하고 한양으로 진격해 일본에게 놀아나는 친일 정부를 몰아내고 우리 힘으로 우리 정부를 만들어 새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다.

• 11월에 일본군은 진저우성 및 뤼순 점령하고 뤼순에서 포로와 시민 6만명 학살.

• 12월
... 동학농민군은 한양진격을 위한 전초기지인 공주점령 시도.
... 공주남쪽 우금치에 최신 자동화기 장착한 일본 기계화 부대 포진.
... 약 10만 농민군(30만이라고도 함) 우금치 점령을 위해 7일간 50여 차례 진격. 약 500명의 생존자만 남기고 괴멸.
... 일본은 훈련 받지 않은 조선 민중의 전장심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함.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위력을 임진왜란 이후 다시 경험함.

- 1895 시모노세키 조약과 을미사변.

시모노세키 조약

•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파기 및 조선의 독립승인.
... 이후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면, 그것은 독립국 조선과 일본의 문제이지 중국의 일부를 침탈한 것이 아니라는 명분을 갖게 됨.
... 위만주국이라는 일본이 세운 만주 괴뢰국 또한 그와 같은 논리.

• 요동, 대만, 대만의 부속제도인 펑후제도의 할양.

... 요동과 대만은 중국을 둘러 싼 전략적 요충지다.
... 현재 일본 대신 미국이 중국 포위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대만과 대한민국을 활용중이다.
... 특히 대만은 미국에 의해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불리운다.

•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얻고,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새로운 이윤을 창출했으며, 전쟁을 명분으로한 일본 국내의 과다 세금징수 불만을 잠재우고, 군수물자 교역을 통해 급상승한 자본가들의 이윤등을 통해
일본자본주의는 공황을 딛고 일어서게 되었으며, 이후 동아시아 전쟁을 일으켜 제국주의시대의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된다.  

을미사변

•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함으로서 국가적 반일세력 발흥 가능성을 사전에 제거한다.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자국민들을 학살하는 나라의 국모를 누가 국모라 여기고 그 존엄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갖겠는가.

조선은 이미 안으로부터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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