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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띠띠사 4 - 자본주의와 윤리.
이름: 박대환


등록일: 2009-08-25 05:07
조회수: 1232 / 추천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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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휘
자본주의와 윤리에 관한 내용은, 한국 현대사를 직접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2009년 현재 자본주의 내면화가 달성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과거를 돌이켜 보는데 기본적으로 한 번 되짚어 보아야 할 내용이라 여겨 작성되었습니다.

철학부분은 아무리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보려해도 한 번만 발을 삐끗하면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할 것 같은 미궁으로 빠져 버리는지라 제가 함부로 손을 못대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고의 대상이 대단히 말초적인 '돈'과 그 반대로 매우 심층적인 '윤리'의 대립에 관한 것이라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ie 'Geist' des Kapitalismus.' 정도는 얼른 떠올릴 수 있습니다. 대충 출판 연도를 찾아 보니 1920년이라 되어 있고 그 전에 이미 그 내용들이 2년에 걸쳐 잡지에 실려 왔다하니, 그 유명한 막스 베버가 이미 우리보다 100년 전에 자본주의 황금기인 1920년대에 돌입함에 앞서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적 욕망 사이의 합리적인 랑데뷰를 모색해 본 셈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막스 베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 막스 베버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은 책이 이야기하는 그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만남, 즉 윤리와 돈의 충돌한 시점의 이야기들을 한 번 들춰 보려합니다.

개신교 윤리Die protestantische Ethik라는 명칭에서부터 벌써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가톨릭 윤리와는 차별성을 지닌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냥 기독교 윤리라고 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자본주의 정신을 이야기 하고 있으니, 우리가 제목으로부터 당장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돈을 중심으로 구교와 신교의 생각이 어떻게 나뉘는가 하는 주제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에서는 상업적 이윤추구나 고리대금업 자체를 죄악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교리가 그렇다는 것일 뿐, 부패한 현실 기독교의 가렴주구는 끝간 데를 몰랐습니다. 11세기-13세기에 걸쳐 약 200년간 십자군 전쟁을 겪으며 좋건 싫건 유럽대륙은 신성과 세속의 가톨릭적 울타리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공동체 성격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존재가 섞이면 새로운 것이 조합되어 나오 듯, 그렇게 서양은 중세를 끝내고 르네상스시대를 맞이합니다. 가난, 무지, 전쟁, 박해 등의 중세적 특징을 거쳐 오며 민중은 이미 종교가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현실적 역량에 결정적 회의를 갖게 되었고, 대안은 결국 우리 인간들 자신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멘탈리티의 변화가 일어납니다.인간의 눈으로 그리스와 로마시대와 같은 과거를 재조명하고 기독교 이전의 인간중심 세상에 대한 부흥을 꿈꾸지요.

인간이란 욕망입니다. 욕망은 곧 소유이며, 소유의 대상은 곧 권력과 재화(돈)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은 다시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세계의 평화를 붕괴합니다.

이야기의 속도를 높여 보겠습니다.
기존의 서양 정치/종교 세력들이 텃새를 부리고 있는 동안 신흥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그들이 같은 기독문명에 쉽게 편입시켜 주지 않는 통에, 남쪽으로는 희망봉을 발견하고 서쪽으로는 황금알을 낳는 신대륙을 발견하는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아라비아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향료를 직접 수입할 수 있게 되었고, 스페인은 신대륙으로부터 금,은 그리고 오렌지 등을 비롯한 각종 신작물 등을 끝없이 실어 나르게 되었습니다. 경제의 중심은 이제 지중해에서 이베리아로 급속히 이양됩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급속한 경제성장가도를 달려 온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자치도시들은, 이베리아에 밀려 그동안 성장해 온 속도만큼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살아 남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상인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시장의 개념"이었습니다.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엔 굳이 경쟁의 개념이 필요 없었지만, 상품이 쏟아져 들어와 값을 절반으로 낮춰 부르는 바람에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애초에 시장에 내어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전에는 계급적 권력이 있으면 소유는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부가물이었으나 이젠 돈만 있으면 소유할 수 있는 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전에 한가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종교문제였습니다.
비록 교황청까지 돈 앞에 썩 어 놀아 나고 있는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상업적 이윤추구를 죄악시 하는 기독교의 본질적 윤리와 정체성을 헌신짝 버리듯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종교적 속박만 없으면, 우리 영토 안에 있는 교회는 우리가 관리하고, 마음대로 무역해서 돈을 벌고, 시장 경쟁력을 높이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누리고 남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교황권력을 넘어서고 가톨릭 윤리를 위반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1942년에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약 25년이 지나는 동안 수 천년 유럽 문명의 중심이었던 지중해 시대가 이제 대서양으로 그 역할이양을 거의 마쳤을 즈음에 루터로부터 종교개혁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루터는 잉여이득을 위한 상업행위는 악마의 가르침이며 이것을 막아야 할 교황이 오히려 부추기고 나섰던 점을 수정하라고 비판했던 사람입니다.즉, 가톨릭 윤리를 더욱 강화했던 사람이지 자유로운 재화 소유욕의 가능성을 열어 주려 했던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윤리를 뛰어 넘는 재화소유에 대한 명분을 끄집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일으킨 변화의 힘은 기독교의 신으로부터 인간과 사물을 독립된 개체로 분리시켜 대상화 시키는 인식의 대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이 엄청난 변화의 힘을 그러나 루터식 구교 중심의 종교개혁이 단번에 흡수할 수는 없었고, 그 기운이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조류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서서히 진화하여 프랑스인 종교개혁가 칼빈을 통해 구체화 됩니다. 루터의 반박문이 내어 걸린 약 20년 후인 1536년에 칼빈은 기독강요 라틴어 판을 출판하고 5년 뒤인 1941년에 같은 책의 프랑스어 판을 출판하여 드디어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합니다. 그리고 그 동안 죄악시 되어왔던 이윤추구욕구가 칼뱅주의를 만나면서 드디어 윤리적 위배 없이 충족 될 수 있는 길을 트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막스 베버가 훗날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라 부른 새 종교적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신앙적 반성으로 구세력의 기득권을 다시 정상화하자는 루터 주의에 비해, 칼뱅주의는 이미 르네상스 시작 무렵부터 진행되어 온 자본주의적 물결을 현실로 받아 들여 잉여물의 자유로운 소유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자는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개념을 성립하게 해 주는 개신교 윤리가 바로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었습니다. 성도의 내세 구원에 대한 인식은 현실에서 직업을 통해 구현되며 따라서 직업이란 곧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구원에 대한 현실적 응답이다라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직업을 갖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모두 하느님의 소명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잊지 말며 성실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21세기에 그대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멋진 직업관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생각하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려울까 싶어도, 당시의 상황에 교황을 통하지 않고도 하느님과 개인이 어떤 식으로든 직접 닿을 수 있다는 개념을 내어 놓고 전파시키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놓고 도전해야 할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각 개인의 현재적 삶에 희망을 불러 넣어 줄 개신교 윤리가 정말 순수한 윤리자체로 먹혀 들어갈 세상이었다면 애초에 종교개혁 자체도 발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종교개혁은 곧 권력자들의 현실논리가 되었고 이는 곧 지지세력의 확보라는 필요성을 갖게 됩니다.세력을 얻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잇따른 타협점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칼빈의 종교개혁에 당위성을 가해 준 현실논리를 결국 '돈'으로 대표한다면, 윤리는 이렇게 종교개혁 공간 안에서 돈과 함께 같은 협상 테이블에 나와 앉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 동안 죄악시 되던 이윤 추구를 위한 이자 획득 개념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습니다.

법정 최고액 이하로는 이자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빈곤한 자에겐 무상으로 대부할 것이며, 과다한 담보책정은 금하고, 채무자와 채권자는 반드시 동등한 이득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상인의 자본으로 번 돈(Handelwirtschaft)과 빈민의 이자로 번 돈 (Finanzwirtschaft)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대출에 의한 이자는 대출자의 사정에 맞게 차등하게 책정되어야 한다 등등입니다.

칼빈은 비록 인간의 이성이라는 현실적 조류를 받아 들이긴 하지만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중에서 하나를 택한 결과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 사이에 있는 진리를 붙드는 차원에서 이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참고문헌 아래].
인간의 욕망이 기독교 윤리로부터 고삐 풀려 나갈 문제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이 부분에서 칼빈은 신과 인간을 다시 연결할 어떤 통합적 대안을 제시하고 싶어했다는 것이 드러나지만 이미 서양을 종교적으로 이어주던 윤리의 끈은 싹둑싹둑 잘려 나가며 그 균열을 채우는 것은 돈이 되었습니다. 탐욕은 주로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나아가 자기 친구와 아내 그리고 자식까지 가식의 테두리 안에서 갈등하게 합니다. 그런 탐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정신적 필터 역할을 해 주던 것이 바로 윤리였습니다.
이성과 종교의 통합을 위한 칼빈의 치열한 노력은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한 성공적 저항을 이끌어 내었으나, 그의 개신교 윤리가 피폐한 농민들을 보호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신교 구교 할 것 없이 신흥부르주아 갑부들이 공공연히 자행하던 고리대금업과 민중을 대상으로 펼친 가렴주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개신교 윤리는 다시 공정하고 정의롭기만 하면 얼마든지 돈을 벌어도 된다는 식의 이성에 의한 윤리 재해석에 활용되었습니다.

이제 시간을 껑충껑충 뛰어 넘겠습니다.
1637년 데카르트 '방법서설'이 출판되고 드디어 이성을 중심으로 한 250년에 걸친 근대문명이 시작됩니다.
1882년 니체의 '즐거운 학문 die froehliche Wissenschaft'이 출판되면서 결국 신의 사망이 선언되었습니다.
이는 곧 인류 보편적 윤리의 최종적 사망 선고였으며 앞으로 전개될 역사가 보여줄 참혹성을 미리 경고한, 한 철학자의 절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때 니체 이전인 1860년에 수운 최제우에 의해 이미 서양의 신이 사망한 것은 간파 되었다는 사실을 한 번 짚고 넘어갑니다.

신대륙발견-르네상스-종교개혁을 통해 물질문명으로 재무장한 서양문명은 자신 보다 약한 남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문명부터 철저하게 복속시킨 후,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통해 르네상스로 발아 되었던 자본주의는 드디어 꽃을 틔우고 기계문명이라는 초월적 힘을 앞세워 드디어 인도-중국으로 이어지는 동양 점령을 시작합니다.

1920년대. 독일 베를린 포츠다머플라쯔는 그 시대에 춤추는 포츠다머플라쯔라 불리었다 합니다. 통독 이후 우리 돈으로 수십 조를 쏟아 부어 그곳부터 재정비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불안합니다.
자기 일에선 프로페셔널이고, 세련되다 못해 뇌쇠적이기까지 하고, 품위있고, 여유있고, 유머있고, 교양있고, 지적이면서 동시에 예술을 사랑하고, 멋진 집에 멋진 자동차에 더군다나 주일 아침엔 땡땡거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종교생활까지하는 이 완벽하게 조화된 인간상을 구축해 놓았음에도, 뭔가 뒤가 찝찝합니다.

보편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을 자본주의적으로 완성시키는 뒤로 죽어가고 파괴되는 무수한 생명과 자연들 앞에서 그는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합/리/화/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거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거나 정의로운 보수주의라거나 하는 부자들을 향한 실천강령들이 생성되고, 막스 베버 같은 시대적 지식인이 다시 종교개혁 시대의 칼빈주의를 들고 나와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재고찰하며, 서양이 저질러 온 세계를 대상으로 한 비윤리적 폭거를 어떤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이라 하여 애써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미 윤리를 탐욕으로 대체한 세상에서 인간의 이성이 어떤 짓을 저질러 왔는지는 재삼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고 현대로 들어선지 약 120년이 지나 21세기의 한가운데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 보편 윤리가 상실된 인간 개체 혹은 그들로 구성된 사회 집단은 그저 합리주의로 자신을 치장한 욕망 덩어리일 뿐, 인간 혹은 그 집단은 이성만으로 제어할 수 없는 비이성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 및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러한 이성에 대한 재인식이 종교나 윤리의식으로부터 제공된 것이 아니라 과학과 이성의 자기 성찰 과정에서 나온 소리들이라는 것입니다. 복잡계이론, 시스템학, 뇌과학, 진화생물학, 행동경제학 등등의 과학 분과들은 그 세세하게 취급하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이성만으로 제어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는 거시적 개념의 공통인자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학의 자체 반성과 대안 모색이 니체가 사망선고 했던 신이 다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성이 참된 이성으로 거듭나야 함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런 말이 성립되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작금의 한국에 필요한 이성의 거듭남이란 결국 플라톤의 기하학적 이성과 퇴계의 주리론적 이성의 통합이라는 상부구조의 구축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어렵군요. -_-… 예전에 이곳에다 주기론과 주리론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판단-선택-행동이라는 삶의 행위에서 절대적 기준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특징적 삶의 원리(?)이자 상식입니다. 그런 상식에 대한 통찰력을 갖는 것은 자기 존재를 자기 존재답게 인식하고 사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골자라고 생각합니다. 성자가 된 청소부를 알아 보는 시야를 갖춘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이 진정으로 어필된다거나, 서태지에 열광한다거나, 벼룩시장에서 그림 한 점 사 온다거나, 친구랑 저녁으로 간단히 자장면 한 그릇 사 먹고 들어 온다거나 하는 모든 현재 진행 중인 삶에 내가 나 자신으로서 동참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더 늦기 전에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21세기에 일어날 혁명의 시작은 그러한 모든 개인의 일상적 행위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입니다.

선진국의 앞선 이성과 합리 그리고 법과 제도는 벌써부터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Heuristic and Creative Industry 를 지원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윤리를 탐욕을 갈아 치우고, 이성과 합리의 이름으로 수억 명의 인간을 살해해 온 500년 짜리 역사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므로 그 질량이 매우 큽니다. 한국이 그로부터 돈냄새를 맡고, 돈벌면 되지 기초과학은 무슨 기초과학 하는 생각에 얄팍한 상술 따위로 엄하게 접근하다간, 그 엄청난 질량차 때문에 또 한 번 개차반 날 수 있습니다. 물론, 현명하게 처신하고자 하면 500년 역사의 질량정도 우리만큼 쉽게 갖출 수 있는 나라도 없지요. 500년 전 베니스에서 벌써 복식부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놀라와 하지만, 그건 이미 고려시대 개성상인의 아들들이 연습장에 시험삼아 낙서하던 그것 아니었습니까.

                                                                                                                                                      22기 박 대 환 조선공학

참고.
[http://blog.naver.com/301dr?Redirect=Log&logNo=20062164651]

추신
1. 본문에서 인용한 책 니체의 즐거운 학문과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다 읽어 보진 않았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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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휘(40기)
잘읽었습니당 ㅋㅋㅋㅋ
2009-08-27
21:30:07
박대환(22기)
그래요 ㅋㅋㅋㅋ
2009-08-28
18: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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